서태지의 지지층 X세대의 등장


서태지를 비롯한 댄스음악의 시대에 앞서 먼저 X세대를 보고 넘어가야겠다. X세대는 캐나다의 대중 작가 더글러스 쿠플랜드가 출간한 데뷔작의 제목에서 유래했다. 1971년부터 1984년 사이에 출생한 연령층으로, 공동체보다 개인을 중시하고 좀 더 자유로운 사고관을 특징으로 가진다. 요약하면 ‘개인주의’가 되는데, 이는 ‘소비’를 중시하는 문화와 함께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개성을 표출하는 데 소비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개인과 소비를 중시하는 X세대의 등장은 서구보다 한 발 늦었다. 개인주의는 민주화를 바탕으로 하고, 민주화는 경제 발전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서구가 70년대 민주화와 1인당 GDP 1만 달러를 모두 이루었을 때, 대한민국에는 입만 열면 끌려가서 실종 처리되고(…) 1인당 GDP는 1천 달러에서 빌빌거렸다.



박정희를 칭송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 좀 그렇다



한국도 87년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고, 95년 1인당 GDP 1만 달러를 돌파하며 90년대 초 개인주의와 소비를 중시하는 X세대가 등장한다. 이들의 등장에는 경제 발전과 민주화 외에도 몇 가지 배경이 있다. 먼저 90년대 들어 국제교류의 활성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덕택에 이전에는 라디오만을 통해서 들을 수 있던 문화상품들이 각종 루트를 통해 보급된다. 또 부모들이 먹고 살만해지며, 자식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10대와 20대의 소비력이 증가한다. 그리고 당시 20세 내외의 청년들이 2차 베이비붐 세대인지라 쪽수를 통해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점도 하나의 요인이다. 마지막으로 90년대 북한과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저항의 에너지를 문화와 소비로 돌리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엥겔계수가 빠르게 떨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X세대’라는 말은 ‘개인주의’와 ‘소비주의’외에 ‘세대 갈등’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X세대라는 말이 유행한 계기는 X세대를 마케팅 용어로 전면에 내세운 93년 이병헌의 아모레의 트윈엑스 광고였다. X세대라는 말이 제대로 어필한 것도 결국 신세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와의 세대갈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듯 언제나 세대갈등은 존재했지만, 산업화가 급격히 이루어진 한국에서 세대갈등은 꽤 심했다. 여기에 대한 비교적 중립적인 서술은 신세대, 고정관념은 싫다. 독특한 ‘나만의 인생’ 추구를 통해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성세대의 태도는 훨씬 부정적이었다.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은…



X세대는 당시 기성세대에게는 그냥 ‘이해 불가능한 존재’였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통해 당시 뉴스들을 검색해보면 94~97년까지 ‘신세대’를 달고 나온 기사가, 나머지 전체 기간의 기사보다 더 많다. 또 ‘X세대’를 검색하면 92년까지는 한 건의 기사도 없다가 94년부터 3년간 엄청나게 화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준의 세대갈등은 유례 없는 것이었다. ‘조직’보다 ‘나’를 우선시하고, 틀에 맞지 않은 복장과 스타일을 연출하고, 먹고 살기 위한 이상의 감성적 소비를 하는 신세대를 기성세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할까? 누군가를 조져야 한다. 요즘 학교폭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루이비통 백을 맨 어른들은 가만히 있는 노스페이스를 조지고 있다. “우리 순수한 아이들을 노스페이스가 망치고 있어!”식의 논리는, 수십 년 전부터 “호환 마마보다 두려운”을 반복하며 만화, 게임 등 각종 신세대가 즐기는 문화에 대한 공격으로 이루어졌다. 기성세대가 X세대를 조지기 위해 공격해야 할 대상은 바로 ‘X세대의 아이콘’ 서태지였다. 



노스페이스를 죽입시다. 노스페이스는 나의 원쑤



서태지의 인기는 이러한 X세대의 등장 안에서, 세대갈등의 아이콘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서태지는 X세대의 우상인 동시에, 기성세대에게는 적의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갤럽연구소의 93년 2월 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태지가 1집 활동을 마쳤을 때 서태지를 좋아한다는 반응은 23.3%에 불과했다. 이는 ‘좋아하지 않는다’의 37.1%에 크게 뒤쳐지는 것인데 좋아하는 계층이 학생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 : 서태지를 죽여라 vs X세대 : 서태지를 지켜라


그렇다면 서태지는 어떻게 X세대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문화권력의 충돌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던 문화권력은 소비력이 커진 베이비붐 세대인 X세대에게로 조금씩 넘어갔다. 여기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발이 극심했다. 반면 서태지는 X세대의 댄스음악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취향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했다. 때문에 기성세대는 서태지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고, X세대는 자신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서태지를 지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서태지의 문화권력은 더욱 강해졌고 ‘문화대통령’에 이르게 되었다.


기성세대가 서태지를 공격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서태지는 당시 등장한 모든 X세대가 좋아하는 인물 중 가장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갑자기 튀어나온 ‘문화 게릴라’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음악과 패션, 행동이 기존의 연예인들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가 들고 나온 랩 음악은 당시 한국에서 한 번도 주류에서 성공한 적이 없는 음악이었다. 기성세대는 이런 랩을 시끄럽고 따라할 수 없다고만 생각했지만 X세대는 이에 열광했다. 패션 또한 거지풍에 가까운, 실생활에서는 본 적이 없는 그런지 룩을 바탕으로 했는데 이는 잘 짜인 사회적 복장 규율에 대한 도발에 가까운 복장이었다. 


더 큰 이유는 재귀(再歸)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X세대들이 서태지에게 엄청나게 열광했기 때문에 기성세대는 더 서태지 공격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인기가 없었다면 ‘동네 미친 놈’으로 취급하고 넘어갔지만, 당시 서태지의 인기는 그렇게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그 열광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아이들은 그 어렵고 복잡한 ‘회오리춤’을 따라 추겠다고 난리를 쳤다. 서태지가 들고 나온 모자는 남대문을 휩쓸었다. 조용한 발라드 속 한둘의 댄스 음악이 있던 가요프로는 서태지를 위시로 한 댄스음악에 점령됐다. 이쯤 되면 전쟁이다.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던 문화권력이 신세대에 점령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영화 실미도에 등장하는 명대사다. “이렇게 된 이상 서태지를 친다.”는 기성세대의 공격은 과연 위력적이었을까? 위력적이었지만, 아쉽게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거기에 결과적으로 서태지의 지위만 더욱 공고하게 해 버렸다. 서태지가 기성세대의 공격을 이겨낸 것은 마케팅적 전략이든, 음악적 역량이든, 혹은 그 둘의 조화이든 서태지가 X세대를 정당화할 몇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흔히들 ‘아티스트’라고 하는 음악적 역량과, 록 음악을 베이스로 한 그의 음악에서 비롯된 ‘저항’이라는 사회적 의식이 그것이다.


야! 신난다!



먼저 ‘아티스트’라는 측면을 살펴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티스트’라는 표현이 한국에서 흔히 ‘딴따라’와 대립항을 이룬다는 점이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어필하는 예능인들은 능력 없이 돈벌이를 위해 활동한다는 의식은 지금도 ‘아이돌’에 대한 편견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에 대해 강준만 교수는 “한국인들은 코메디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서는, 꼭 별 내용이 없다는 단서를 붙인다”는 말로 꼬집은 바 있다. 흔히들 기성세대들이 “들을 노래가 없다”고 하는 표현 역시 이런 편견에 기인한다.


그런데 서태지는 평단으로부터 음악성을 인정받는다. 2집의 ‘하여가’는 전문 음악인들로부터 93년 발매 음악 중 가장 음악적 완성도가 높다는 평을 듣는다. 이후 3집과 4집에서도 호오가 엇갈리지만 그의 음악적 역량에 대해서는 주류 언론도 인정하는 분위기가 이어진다. 적어도 매 앨범 새로운 장르를 수입하거나, 기존 장르들을 믹스하는 ‘혁신’이라는 이미지 역시 그의 ‘아티스트’ 이미지를 굳혀 나간다. 


상업성에서 밀리는 기성세대가 의지해야 할 평론가들마저도 서태지를 인정하자, 서태지를 좋아하고 즐기는 X세대는 기성세대의 공격에 주눅들기는커녕, 오히려 자부심을 가지고서 서태지를 응원하게 된다. 김이승현과 박정애의 빠순이, 오빠부대, 문화운동가? 에 따르면 “‘빠순이’라는 말은 이른바 남성스타를 따르는 ‘오빠부대’ 소녀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이다. (중략) 이에 대해 서태지의 팬들은 ‘빠순이’란 말을 타가수 팬들에게 떠넘겨 비난을 피해가거나, 주눅들지 않고 맞섰다. 스스로를 ‘팬덤’이라 주장하며 ‘팬덤운동’이라는 대중문화개혁운동을 지속해나갔다.”고 서술하는 점은 서태지의 팬들이 가진 적극성과 자부심을 잘 보여준다.


참고로 데뷔 때 서태지는 저 프로그램 사상 최저점을 받았다



다음으로 서태지가 가진 ‘저항’이라는 사회적 의식도 기성세대의 공격에 맞서는 주요 요소로 작용한다. 김현정과 원용진의 팬덤 진화, 그리고 그 정치성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팬들은 상당 수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에 열광했던 이유로 자신들이 청소년기에 겪은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식의 지배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것을 공고히 하는 제도적 장치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감수성을 서태지가 보였다는 점을 들고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당시 서태지가 가진 ‘저항’의 이미지가 X세대들에게 어떻게 어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저항 의식은 3집 앨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교실이데아’는 직설적, 전투적으로 교육이라는 사회 시스템을 강하게 비판한다. 물론 기존 민가들도 열심히 세상을 비판했으나, 거시적인 민족ㆍ노동 문제를 이야기했기에 호응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제도권 스타가 10대들의 시각에서 일상에서의 구조를 음악으로 비판하자 그 반응은 엄청나서, 웹진 이즘이 선정한 우리를 흔든 노랫말 3위에 오르기까지 한다. 여기에 서태지는 ‘발해를 꿈꾸며’를 통해 단순히 반항적인 청소년기의 모습을 넘어 ‘우리도 사회의식이 있다’는 이미지를 부각하며 X세대의 정당성을 더욱 강화했다.


3집 당시 기성세대의 저항감은 상당했다. 마침 댄스 음악의 전성기가 열리며 음악시장이 10대 위주로 재편되자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 기사들을 나열해 보면 정체불명 ‘신세대’ 그들만의 문화 있나?,  댄스뮤직 범람 음악이 안 보인다, 노래 삼키는 댄스열풍 가요시장 왜곡 심화, 신세대 대중가요 리듬만 있고 의식은 없다, ‘댄스열풍’ 끝이 안 보인다 등 X세대와 그들이 즐기는 문화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 가득했다. 심지어 교실이데아는 역재생시 ‘피가 모자라’라는 가사로 들린다는 악마의 노래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하여간 서태지는 온갖 구설수를 달고 살았다, 위에 김민종 누드는 뭐여(...)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서태지의 팬덤을 공고화시키고 X세대의 아이콘 지위를 굳건히 할 뿐이었다. 이와 함께 PC통신 등을 통한 새로운 대중문화 평론 세력이 들어서면서 그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도 이어졌다. 이동연은 “서태지와 아이들 실험정신, 건강한 신세대 문화주체”라 반박했으며, 기성세대는 우리를 쥐어짜지 말라 X세대는 건강하다는 기사에서 알 수 있듯 해외의 앞선 문화평론을 수용하며 신세대에 대한 정당성을 꾀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생겼다. 이런 움직임들은 이미 주류 문화권력을 얻은 X세대들에게 더욱 힘을 불어넣어준다.


결국 서태지의 이미지는 ‘저항과 혁신을 지향하는 아티스트’로 요약할 수 있다. 서태지가 활동한 시기는 많은 새로운 음악들이 등장했다. 김건모의 레게, R.ef의 레이브, 노이즈의 하우스, 듀스의 힙합 등은 모두 대중 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당시에는 서태지처럼 매번 새로운 혁신, 강한 저항을 보여주지 못했고, 아티스트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오직 서태지만이 평단에서 인정받고, 기성세대들에게 공격받고, 심지어 그것을 이겨냈다. 이는 마치 재벌 중 삼성만 까이듯 최강자와 아이콘만이 누릴 수 있는 비평과 공격을 받았고 X세대를 대변해 맞서 싸운 것이다.


그리고 그 막바지에서 서태지는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서태지는 현실을 넘은 진짜 신화가 되어버린다. 공격할 대상이 사라져버리자, 기성세대들은 GG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기획형 아이돌의 시대가 오며 오히려 기성세대조차도 서태지를 그리워하게 되는 묘한 현상이 생기면서 그의 천재성은 더욱 추앙받게 된다.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 창조적 지식인을 원하는 신지식인론이 떠오르며, 그는 더욱 영웅화된다. 그에 대한 평가로 따지자면 타이밍 좋은 은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단순히 그런 관점에서 보기에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남겨버렸다. X세대들에게 그는 정말로 닮고 싶은 존재였고, 시대의 표상이었다.


한겨레 박재동 화백의 당시 만평




전무후무한 트렌드 세터 서태지의 탄생


이렇게 X세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그에게는 전무후무한 단 하나의 지위가 주어졌다. 바로 ‘트렌드 세터’가 그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서태지를 역대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평가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X세대들에게 대체할 수 없는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트렌드 세터는 그 뜻 그대로 스스로 트렌드를 창조하는 인물이다. 서태지가 채택한 코드는 항상 신세대의 모방심리를 함께 불러왔다. 예로 서태지의 4집 당시 스노우보드 패션은 가수가 파격적 패션을 들여오고 유행시킨 유일한 사례다. 이는 단순히 ‘옷이 예뻐서’ 구매를 한 게 아니라, 서태지를 ‘닮고 싶어서’, 또는 ‘문화코드를 공유하기 위해서’ 옷을 입었다는 점에서 다른 유행과 차이가 크다. 존 피스크에 따르면 팬덤은 “사회적/대중적 차별, 미학적 차별을 행한다. 마돈나 팬덤에서 팬들은 머리 모양, 화장술, 옷이나 액세서리 등의 선택 등을 통해 소통을 시도하고 정체성을 구한다.” 서태지는 항상 젊은 층이 동일화를 구하고자 하는 대상이었다.


이러한 모방 심리에 의한 소비 조장은 서태지가 기성세대의 큰 반발을 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 서태지는 타 가수들과 대비되는 ‘저항’과 ‘혁신’의 ‘아티스트’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서태지의 팬층은 타 가수의 팬층과 달리 주눅들지 않고 사회적 편견에 맞서며 자신들의 취향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마찰은 서태지에 대한 동일화하고자 하는 심리를 더욱 자극했고, 그의 코드는 소비문화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패션은 동일화 심리를 드러내기 가장 쉬운 코드이자 아이템이다. 때문에 서태지의 패션은 항상 화제가 되었고, 당대 패션의 흐름과 판매에 영향을 줬다. 이하에서는 그의 패션을 분석하며, 패션계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위의 부분에서 디테일한 부분에 문제가 있지만…



워낙 옛날 분이라 자료 찾기도 힘드니까 이걸로 퉁치겠다




서태지 패션의 개요 : 그런지룩 베이스의 1기와 스노우보드 패션의 2기


서태지 패션에 대해서는 여러 논문들이 다루고 있으나, 연구자마다 주장이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크게 볼 때 그런지 룩을 베이스로 한 1집부터 3집까지의 1기 패션과, 그 흐름에서 벗어난 4집의 2기 패션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그런지 룩을 베이스로 한 1기 패션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그런지 룩은 1980년대 말 미국 시애틀을 중심으로 한 ‘그런지 락’ (Grunge Rock) 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80년대 모든 것이 세련되게 매치된 토털 룩(total look)과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됐다. 말 그대로 더럽고 지저분한 느낌을 주는 스타일로 1960년대 히피룩에서 보이는 초라하고, 남루한 분위기와 하류층복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스타일의 특징적인 요소는 패치워크와 믹스매치 레이어링(layering)이다. 그런지룩은 특별한 형식 없이 입는 것이 특징으로 여러 가지 스타일을 섞거나 이질적인 아이템을 섞는다. 특히 이질적인 소재의 믹스매치는 디자이너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법이다. 참고로 이런 원론은 디자이너들 이야기고, 흔히 이야기하는 유럽산 꽃거지들은 정말 아무거나 막 입는 그런지룩일 때가 많다. 


중국산 꽃거지의 위엄



패션사적 의미에서 그런지 룩을 들여왔다는 점에서도 놀랍지만, 브랜드 일관성에서 볼 때 꽤 시대에 앞선 시도라는 점이 더 놀랍다. 이는 최근 케이팝이라는 이름으로 무대를 세계로 확장시키고 있는 기획형 아이돌이 보여주는 ‘일관된 컨셉’을 이미 20년 전에 선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장광효가 스타일링을 맡은 소방차도 승마바지라는 새로운 패션을 선보이기는 했지만, 음악과 패션을 일치시키는 일관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그런지 룩이 서태지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을까? 먼저 의미 측면에서 그런지 룩은 서태지의 자유분방한 컨셉과 잘 어울렸다. 그런지 패션은 90년대 초 침체됐던 청년문화를 부활시키고, 스트리트 패션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또 물질만능주의 부르주아에 반기를 든 젊은이들 사이에서 구속 받지 않고 자기 편한대로 입고 싶어 하는 욕구를 잘 반영하여 인기를 얻은 패션이다. 이는 당시 서태지의 스타일링에 도움을 준 장광효가 세계 젊은이들의 흐름을 잘 읽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일종의 DIY, 능동성라는 점에서도 그런지룩은 서태지의 컨셉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런지 룩은 셀프 리폼(self-reform) 의상, 중고시장에서 발견한 아이템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진을 대표적인 아이템인 진(jean)을 찢거나, 물을 빠지게 하여 새로운 청바지를 만들어내거나. 시접처리를 않고 올이 풀리도록 만들어 마무리를 하지 않는 듯한 의상이나, 스스로 옷을 자르고 이어 붙이는 등이 그 예이다. 이 과정에서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감성이 표출되고 전혀 다른 조형상과 스타일이 탄생하게 된다. 


또한 넓게는 당시 시스템적인 공동체주의와 갈등을 일으키는 신세대의 개인주의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어느 시대건 정통이라 불리는 하이패션의 자존심과 패션산업의 중추를 구성하는 엘리트주의, 그들이 만들고 유포하는 유행의 논리와 방식이 있다. 그런지룩은 깔끔을 떨고 요란한 장식으로 구성된 ‘그들’인 사회 지배 계층이 주장하는 옷과 대칭적 위치에 있는, 더럽고 지저분한 느낌을 주는 스타일이다. 기존의 조직 논리를 부정하는 조롱하며 대치한다는 점에서도 서태지가 가진 혁신과 저항이라는 느낌에 잘 부응한다.


아래에서는 서태지의 앨범별 패션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2기 패션은 좀 독특한 측면이 있어 4집과 함께 따로 소개한다.




◆ 서태지와 아이들 1집(1992년~1993년) : 그런지 패션의 레이어드 룩


초기의 서태지룩은 그런지룩과 레이어링을 기본으로, 힙합패션의 요소인 ‘오버사이즈’를 차용한 패션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당시 서태지를 보면 헝클어진 머리 스타일과 허름한 티셔츠와 점퍼, 낡고 찢어진 청바지, 낡아서 해진 모자 등을 활용했다. 때문에 다만 실제 거지스러워 보이는 걸 원하지 않아서인지(…), 해외 패션의 이질감을 우려한 것인지 당시 스타일링을 도운 장광효는 우리나라식의 귀여운 그런지 스타일링을 시도한다. 


그럼에도 당시 서태지의 패션은 충분히 파격적이었다. 패치워크된 데님이나 아주 낡은진, 오버사이즈된 상의를 중심으로 허름한 코트, 꽃무늬 스커트, 털실로 짠 스웨터 같은 여러 종류의 옷을 겹쳐 입는 레이어링, 제멋대로 자른 머리, 군화 스타일의 부츠, 털실로 짠 모자 등을 주된 아이템으로 사용했다. 



귀티나는 서태지에 비해 양현석과 이주노는 뭔가 날티가(...)


 

이는 당시 시대를 상당히 앞서가던 패션이었다. 그런지룩이라는 스타일링을 정의내린 시기는 89년의 마크 제이콥스(Mark Jacobs)이고, 파리의 고급 기성복 컬렉션 무대에서도 선풍을 일으켰고, 획기적인 패션 흐름으로 자리잡은 것도 90년대 전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크 제이콥스의 선동적이고 발칙한 컨셉은 90년대 패션계에 적지 않는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후 하이패션 디자이너들이 그런지의 영향을 받은 의상을 선보임으로써 90년대 초를 대표하는 스타일로 자리잡는다. 


방송용 패션이 너무 파격적이었던 것에 비해 음반 재킷은 완전 단정한 패션



이런 그런지 룩은 너무 앞서가다보니 신세대 입장에서도 따라하기 꽤나 난감했다. 그러다보니 이 중 가장 무난한 아이템인 모자만 겁나게 유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벙거지 모자와 야구모자가 그 아이템이다. 


서태지의 벙거지 모자는 정확한 표현으로 서태지의 모자는 스페이 햇(SPEY HAT)이며, 미국인들의 낚시용 아웃도어 모자다. 그 당시 미국의 힙합음악을 하는 흑인 청년들과 그런지 룩을 지향하는 청년들에게 간간히 선택된 아이템이기도 했고, '외국의 최신 패션'을 먼저 들여오려는 서태지와 장광효의 패션 성향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시이기도 하다. 스페이 햇은 후에 '엠씨 스나이퍼' 등이 잘 쓰는데 여전히 거지 같은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양현석과 이주노가 유행시킨 모자는 몇 년 전 메이저리그의 인기와 발을 맞춘 야구 모자, 베이스볼 캡이다. 이는 시대를 앞서가는 스페이 햇과 달리 그 당시 미국의 후드티와 베이스볼 캡을 매칭한 일상적 스타일링을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기존 아이템의 재발견에 가깝다. 덕택에 벙거지 모자, 스페이 햇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 서태지와 아이들 2집(1993년~1994년) : 힙합바지 & 레게퍼머

 

국내에 초기 힙합패션을 들여온 것은 현진영이다. 그는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통해 힙합바지를 방송에 선보인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힙합패션을 보급한 것은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 없이 돌아오자마자 폭풍인기를 얻던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서태지는 2집을 통해 1집보다 좀 더 반항적인 패션을 선보이는데 주 아이템은 오버사이즈의 힙합바지, 티셔츠, 그리고 레게머리였다. 


서태지가 2집에서 선보인 패션은 흔히 힙합으로 이야기되지만 결국 베이스는 그런지 룩이다. 힙합패션의 기본 아이템은 아이스진 배기바지와 헐렁한 티셔츠, 힙합식 정장구두, 황색 팀버랜드 배기 바지 중에서도 밑이 늘어지지 않고 약간 좁아지는 바지 (우리나라에서 많이 입는 밑통이 넓어지는 바지는 정통 힙합 바지라고 할 수 없다), 금이나 은으로 된 시계인데 서태지는 이 중 (전통에서 벗어난) 힙힙바지 외에 특별히 다른 아이템을 차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을 좀 벌더니 얼굴이 확 편 이주노와 양현석, 서태지는 원래 잘 살아서(...)



때문에 서태지가 2집에서 보인 패션은 힙합을 차용한 그런지 룩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이를 통해 서태지는 한층 파격적이고 반항적인 이미지를 과시한다. 힙합이 거리패션이고 아웃사이더들의 반문화로, 몸에 달라붙어 세련미를 강조하는 백인 중심의 패션 문화에 대한 저항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하여가’에서 스크레칭을 도입하며 힙합패션과 음악을 초보적인 수준에서 조화를 꾀하기도 한다. 


힙합패션의 기본이 되는 전체적으로 통이 넓은 배기바지는 나름 흑형들의 흑역사를 통해 등장한 아이템이다.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흑인 범죄자들의 죄수복에서의 유래다. 교도소도 군대와 같은지라 옷에 몸을 맞춰야 하는데(…) 자살의 위험으로 인해 벨트를 착용할 수 없는지라 그냥 흘러내리게 큰 바지로 입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재고설이다. 돈이 없는 흑인들은 떨이 세일을 애용했는데, 정작 비싼 바지를 염가에 구입하고서도 수선할 돈이 없어서 그냥 사이즈를 크게 입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 아마추어 랩퍼가 통 큰 배기바지를 입고 노상무대에 나온 후부터 패션 아이템으로 정착됐으며, 바지가 힙에 걸쳐서 안의 속옷이 보이게 입는 이너 힙합 (INNER HIP HOP) 스타일, 밑통이 좁아지는 배기바지 스타일, 전체적으로 허벅지가 커 보이는 드럼 힙합 스타일 등 다양한 패션으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서태지 음악은 힙합이 중심이 아닌 부수적 조합으로 들어갔기에 패션에서 힙합 쪽으로 다양한 시도는 하지 않았다.




◆ 서태지와 아이들 3집(1994년~1995년) : 카나비스트리트식 펑크 레이어드룩 & 힙합스타일


3집 활동시기는 댄스음악이 빠르게 인기를 끌었다. 이 때 댄스가수들의 패션은 대개 오버사이즈 힙합바지에 상의를 걸치는 스타일로, 서태지의 2집과 부합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서태지는 여기서 또 한번 새로운 패션을 선보인다. 아쉽게도 힙합패션이 강세인 시기였고, 노래 자체가 워낙 화제가 되던 시기라 3집의 패션은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파격적 패션’이라는 서태지의 흐름을 잃지는 않았다.



참고로 이 시기에 김원준도 이런 치마패션을 사용했는데 곧 방송정지 먹었다(...)


 

3집 의상은 정의 자체가 힘들다. 기본은 여전히 그런지 룩에 있지만 일반적인 그런지 룩에서 사용하는 아이템과 이질적인 아이템을 다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나비 스트리트(Carnaby street)에서의 아이템을 주로 차용했다. 뉴스보이 캡의 사용, 스코틀랜드 남자용 스커트 퀼트의 사용, 타탄 체크 (Tartan check)로 대표되는 버버리(Burberry) 나 닥스(DAKS)방식의 체크패턴을 차용한 아이템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만 서태지의 3집 패션을 카나비 룩으로 분류하기는 힘들다. 카나비 룩은 런던스트리트 펑크패션으로 어느 정도의 정형화가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앵글로색슨 족의 귀족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타탄 체크를 바탕으로 한 프레피 룩을 저항적인 의미로 자신들에 맞게 차용했다. 이에 반해 서태지는 여전히 그런지 룩에 기초를 두고 자유롭게 카나비 룩의 아이템을 가져오되, 이를 힙합바지와 뒤섞는 등 히피적인 분위기로 녹여내고자 했다. 때문에 서태지의 3집 패션은 카나비 룩이라기보다는, 카나비 룩을 차용한 그런지 룩에 가깝다. 


서태지가 이를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3집의 패션은 당시 사회적 문제였던 학교와 학생의 문제를 꼬집어내는 패션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서태지가 차용한 타탄 체크는 미드 '가십 걸(Gossip Girl)'과 2009년 방영한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통해 2000년대 후반 인기를 끈 프레피 룩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프레피 룩의 어원 '프렙(prep; preparatory school)'은 아이비 리그 대학에 많은 학생들을 보내는 고교 과정의 대입 예비학교를 의미한다. 뭔가 음모론스럽지만 ‘서태지는 이를 비꼬기 위해 타탄 체크를 선택한 거였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는 해석의 하나이고 정답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하자.


여기에 서태지는 튜닉까지 활용하는 과감함을 보여준다. 튜닉이란 라틴어의 '속옷'을 의미하는 튜니카(tunica)에서 파생된 단어다. 원래는 그리스, 로마 시대에 착용된 통자의 장식이 거의 없는 상의로, 길이는 시대에 따라 무릎이나 종아리끝 정도의 기장 등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더운 남부 유럽에서는 '속-겉'의 차이를 두지않고 입었으며, 북구유럽에서는 이중적인 형태로 속옷 또는 겉옷, 평상복으로 이용됐다. 


튜닉을 차용한 서태지의 무대



현대에는 그것과 비슷한 홀쭉하게 된 통형인 실루엣의 의복 전반, 혹은 똑같은 실루엣을 가진 것으로, 허리아래에서 무릎길이 정도까지의 심플한 모양으로 된 재킷이나 블라우스, 탑종류, 가톨릭의 성직자가 미사 때 착용하는 길이가 긴 제례복 등을 의미한다. 서태지가 입은 옷은 중세 바이킹족인 노르만족의 튜닉 (Norman Tunic)과 프린트 패턴상으로는 후기 바로크의 군복용 튜닉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팔 부분을 끈으로 묶은 것을 통해 르네상스시기 튜닉의 형태도 발견할 수 있다.



서태지 귀족의 후예설과 아무 관계 없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대체 3집 패션을 통해 읽을 수 있는 흥미로움은 서태지의 새로운 것에 대한 집착이다. 2집에서 힙합을 차용하더니, 정작 힙합이 대중화되자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아이템을 잔뜩 들고 왔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이전 앨범에 비해 댄스 음악을 줄이며, 퀼트와 튜닉 등으로 남성미도 함께 줄이며 나름의 완결성을 추구하려 했지만, 여전히 난삽함을 바탕으로 하는 그런지 룩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서태지의 3집은 서태지의 앨범 중에서도 가장 실험적인 앨범으로 평가 받았는데, 패션 역시 마찬가지로 바라봐야 할 것 같다. 실험은 언제나 상업성과 멀어지게 마련이라 내려간 앨범 판매량처럼, 3집의 프레피 아이템 도입은 1집의 모자와 2집의 배기바지에 비해 딱히 히트 상품을 창출하지도 못했다. 이 틈을 타 김건모는 레게 음악과 패션으로 상업적으로 엄청나게 성공하며, 서태지 이상의 인기를 끄는 가수로 떠오른다. 그리고 서태지는 4집을 통해 스스로 상업적으로 최고임을 증명해 보인다.




◆ 서태지와 아이들 4집(1995년~1996년) : 스노보드 패션 & 힙합스타일


앞서 서태지와 아이들 4집에서의 패션을 서태지 2기 패션이라 칭했는데, 이는 기존에 고수해오던 자유를 기반으로 한 저항을 상업성과 절묘한 타협을 한 저항을 패션 아이템으로 활용한 스타일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은 대한민국에서 가수와 패션을 논할 때 가장 상징적인 앨범이다. 유일무이한 트렌드 세터라는 칭호는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한 명의 가수가 선도적으로 트렌드를 들여오고 유행까지 선공시킨 유일무이한 사례가 아닐까 한다. 그것이 바로 ‘스노우보드 패션’이다. 서태지는 4집에서 오버사이즈드의 아이템을 차용하고 선글라스, 자신의 이니셜 S를 딴 듯한 비니를 통해 스노우보드 패션을 구현했다.



1기 그런지 룩에서 완전히 벗어난 2기 스노우보드 패션



스노우보드 패션은 온몸으로 자유롭게 보드를 타기 위해 힙합패션의 오버사이즈 느낌을 차용한 스키복에서 시작했다. 때문에 스노우보드 패션은 힙합패션과 스키패션이 뒤섞인 형태로 발전했다. 빅사이즈를 지향하며 컬러풀한 패턴과 소재의 스키복, 방수 처리된 빅사이즈의 티셔츠를 레이어드 하는 형태의 패션은 지금까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최근의 스노우보드 패션과의 차이가 있다면 90년대는 미니멀리즘의 시대였기 때문에 모노톤, 블랙&화이트의 사용이 돋보인다면, 2000년대 이후는 맥시멀리즘이 자리잡았기에 좀 더 다양한 색상이 눈에 띄는 정도이다.


당시 서태지는 미국에서 이미 정착된 형태의 스노우보드 패션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큰 독창성은 보이지 않는다. 4집의 스노우보드 패션을 통해 읽을 수 있는 건 기존의 독창성과 혁신보다는, 서태지의 눈부신 마케팅 능력과 트렌드세터로의 지위이다. 그는 그의 이름에 걸맞지 않는 3집의 상업적 실패, 김건모에게 상업적으로 뒤쳐진다는 평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음악은 물론 스노우보드 패션을 유행시킨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로 4집 앨범은 실험정신보다 상업성을 중시한 앨범이다. 갱스터랩이라는 ‘반 발짝 앞서가는 전략’으로 비교적 대중에게 쉽게 수용되며 다시금 상업적으로도 정상의 위치에 선다.



참고로 원래 갱스터랩은 이렇게 입고 총 들고 한다. 할렘에서 스노우보드 복 입고 깝치면 맞는다.



그렇다면 스노우보드 패션은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전파되고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이는 네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먼저 상업적으로 검증 된 스타일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1집에서 3집까지 어떻게든 자신들의 스타일을 창조하고자 다양한 아이템을 차용하고 변용한 그런지 룩과 달리, 4집에서는 미국 본토에서 상업적으로 정착한 스노우보드 패션을 그대로 가져왔다.


상업적 정착이 되었음은 모방의 용이성으로 이어진다. 그런지 룩은 그 고유한 특성상 자체적인 스타일링의 완결성을 갖출 수 없었고, 때문에 스타일링 능력이 발달하지 못한 X세대들이 쉽사리 따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노우보드 패션은 파격성에 대한 부담감만 덜어낸다면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녔기에, 마치 백화점 마네킹에 입힌 옷을 그대로 따라 살 수 있듯 쉽게 따라 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전 3개 앨범의 패션이 일으킨 모방심리는 항상 모자, 힙합바지 등 안전빵 아이템들로 몰려간 반면, 자체적으로 완결성이 있는 스노우보드 패션은 총체적인 스타일링이 좀 더 빠르게 대중들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에 교포사회의 도움도 있었다. 이미 당시 빠르게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던 이민 1세대의 자식들이 귀국하며 조금씩 스노우보드 패션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가요계에서도 솔리드와 듀스를 통해 R&B와 힙합이 한국에 들어왔듯 귀국자녀들은 일종의 문화적 얼리아답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스노우보드 패션에 대한 저항감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마지막으로 서태지의 트렌드세터 파워와 상업성의 적극적 결합이다. 서태지는 여기저기서 후원금을 잔뜩 받았는지(…) 스노우보드 패션을 유행시키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김종서까지 끌어들인 프리스타일 뮤직비디오를 통해 라이프스타일로서의 스노우보드를 전면으로 밀어버린다. 반응은 빠르게 일어났다. 스노보드 패션 도심거리 휩쓴다, 서태지 모자 (…) 패션잡화 불티 등의 기사에서 읽을 수 있듯 서태지는 앨범 하나로 새로운 패션 트렌드를 창조해낸다. 


저들이 신나게 뛰어놀 때 군대에서는 제설작업이 한창이다



흥미로운 점은 상업성을 추구하면서도 서태지는 하위 문화(sub culture)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스노우보드는 1987년 첫 스노우보더 대회로 인해 보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는 스키의 주 이용층이던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스노우보드를 깔보는 분위기가 지속됐다. 조용히 스키를 즐겨오던 기성세대들에게, 슬로프를 주름잡으면서 질주하는 역동적인 스노우보더들은 기존의 스키어들에게 반목의 대상이었다.


하위 문화는 언제나 저항성을 지니고, 저항은 쿨 코드(cool code)의 기반이다. 서태지 4집은 음악과 패션 양 쪽에서 철저하게 상업적이면서 상업적이지 않게 보이는, 마치 미국의 록 신화가 이어져나가던 시기와 같은 쿨함을 과시한 완벽한 마케팅의 사례가 아닐까 한다.


이러한 패션, 멋내기를 위한 저항 코드의 활용은 ‘필승’에서 보여준 일본의 초기 비주얼 락 풍 패션에서도 엿볼 수 있다. 비주얼 락은 1970년대 영국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글램 락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70년을 전후로 반전, 평화와 같은 거시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의 음악에 반한 글램 락은 좀 더 자신을 중시하는 방향을 추구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보이조지가 만든 컬쳐클럽 같은 밴드는 리더이자 보컬인 보이조지가 실제로 여장을 하고 짙은 메이크업을 보여주는 밴드로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후에 일본밴드 라우드니스 (loudness)와 보위(BOØWY)가 따라했고, 엑스재팬이 본격적으로 차용을 하여 그들만의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글램 락은 외형적인 모습에서도 음악을 표현했다. 비주얼 락으로도 이어진 글램 락 패션의 특징은 검은 아이라인에 짙은 색조화장, 원색의 짙은 염색, 그리고 깃털과 레이스, 스팽글 같은 화려한 장식과 타이트하면서도 야릇한 의상 등의 여성성으로 정리된다. 이를 통해 흡사 드랙퀸(여장남자)를 연상시키면서도 굵은 목소리와 남자 같은 행동은 오묘한 매력으로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는 양성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비주얼 록은 화장도 짙고, 머리도 세우고, 옷도 목도리 도마뱀마냥 자신을 부풀리는 연출을 꾀하는 등 좀 더 과장이 강하게 들어가 있다.




데이비드 보위(위)와 엑스재팬(아래) 요즘 저러고 길거리 다니면 화성인 바이러스에 출연할 수 있다



하지만 ‘필승’에서 서태지의 패션은 알려진 것과 달리 글램 락, 비주얼 락과는 차이가 크다. 서태지는 남성성을 전혀 포기하지 않았다. 남성적인 스포티한 아이템, 가죽 바지, 체크 셔츠 등을 조합했으며 특별히 정해진 스타일을 연출하지 않았다. 펑키한 느낌을 냈고 여성적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미지가 생겨난 것은 일단 당시 일본 문화가 제대로 안 들어온지라 별로 안 따지고 대충 떠들었고(…) 서태지의 이름이 엑스재팬 전 멤버 ‘타이지 소와다’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패션도 서태지의 ‘저항’ 이미지를 패션 코드로 녹이는데 성공한다. 당시 원색 염색은 매우 보기 드물었다. 길에서 이런 놈 보면 그냥 미친 놈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런 파격적 패션은 저항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이 역시 젊은이들이 종종 따라했는데, 정말 길에서 시각적 민폐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주의 : 어린이 여러분, 따라하지 마세요




서태지에 대해서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논문 몇 편이 나올 것이고, 워낙 시간이 흘러 자료도 찾기 힘들기 때문에 이 정도로 줄인다. 더 많은 내용을 다룰까 생각도 했지만 정확성에 의문이 가는 부분은 과감히 생략했으니, 추가로 논의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제보 부탁드린다. 다음 편에서는 서태지와 동시기에 활동한 다양한 가수들을 다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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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저는 패션을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수업시간 발표 준비에 이 자료를 참고하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출처를 꼭 밝히고 비영리목적으로 활용하겠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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