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패션사] 1. 아이돌 필수 상식
[아이돌 패션사] 2. 80년대 : 조용필, 소방차, 김완선, 그리고 장광효



90년대 이전의 아이돌과 패션 산업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실 90년대 이전에는 아이돌은 물론이거니와 패션 산업에 대해서도 크게 할 말이 없다.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 충분한 소비력을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요즘 중국이 1인당 GDP 4천 달러 넘었다고 테이프 커팅하는 걸 보고 킥킥대지만 당시 한국이 딱 그 모습이었다. 대충 1인당 GNI를 보자. 

  


흔히들 1인당 GDP가 1천 달로 초과하면 소비재 구입이 가속화되고, 패션은 3천 달러 이상에서 급속한 시장 확대, 5천 달러 이상에서 브랜드 성장, 1만 달러 이상에서 국내 디자이너 등장한다고 한다. 그러니 1인당 GDP가 5천 달러에 이르지 못한, 당시 한국에서 패션 시장의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연예계 역시 마찬가지로 아이돌은 가장 넓은 의미의 ‘10대가 좋아하는 스타’로 해석해도 여전히 작은 시장이었다. 그 당시는 연예인 풀 자체가 현재만큼 크지 않고, 지위도 높지 않아 ‘딴따라’로 불릴 정도였으니. 두 산업이 지금으로 보면 규모나, 운영이나 거의 구멍가게 수준이었기 때문에 스타와 패션의 접목은 매우 요원한 시기였다. 

다만 작은 시장은 시장독점이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당시 연예계에서도 패션에 있어 독보적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남성복 1세대 디자이너 장광효였다. 80년대 아이돌 패션사는 장광효와 스타들의 만남을 통한 패션과 가요계의 접점이 생기고, 소방차의 승마바지, 김완선의 디스코패션이 인기를 끈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80년대의 유일무이한 스타일리스트이자 코디네이터 장광효


장광효는 우리에게 ‘안녕, 프란체스카’의 장쌤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력은 화려하고 다채롭다. 대학진학 당시 디자인학과에서 남학생을 뽑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일하게 디자인이 세분화된 국민대 산업디자인과에 입학, 의상디자인을 부전공한다. 1988년에는 남성복 디자이너로 국내 최초로 ‘뉴웨이브 인 서울’이라는 컬렉션을 열게 된다. 1994년에는 파리 남성복 컬렉션에 참가하는데, 이 역시 국내 남성복 디자이너로는 최초였다. 

흔히들 가장 성공한 1세대 패션 디자이너로 앙드레김, 진태옥, 박항치 등을 꼽는다. 장광효 역시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며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이들 중에서 장광효가 특히 가치 있는 이유는 남성복을 디자인하는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라는 사실과, 패션계와 연예계의 접점을 마련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글의 취지에 따라 그의 디자인사보다는, 연예계와의 접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보다시피 졸리 꽃미남인데, 손석희와는 재수 시절부터 친구라고 한다. 양강의 절대동안(…)


 자기 인물 좀 된다고 거들먹거리는(...) 꽃미남 조국 교수. 서울대 재학시절 전설이었다고...



요람기가 그리는 60년대 농촌 풍경이 ‘기차도 전기도 없었다’라면, 80년대 대한민국 패션 풍경 스타일리스트, 코디네이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장광효는 최초의 남성복 디자이너라는 배경을 업고, 이 시장을 스스로 창출해낸다. 유명 연예인들이 스스로 장광효를 찾아와 그에게서 옷을 구매한 것이다. 레이디경향의 기사를 보자. 
그때가 87년 9월, 조용필씨가 정말 ‘날릴’ 때예요. ‘내가 그래도 디자이너인데, 남성복에 점을 찍는 디자이너인데, 조용필씨 같은 톱 스타가 내 옷을 입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벤츠가 우리 집 앞에 서더니 조용필씨가 내리더라고. 가슴이 뛰었어요. “방송국에서 옷 잘하는 사람 있다는 소문 들었다”고 하면서. 신나게 제 테이스트를, 끼를 부렸어요. 그때 단골이 지금까지 오고 있어요. 저는. 연예인들은 다 한 것 같아요. 안성기, 박중훈, 황정민씨, 비까지. 금난새씨도 17~18년 단골이에요. 정치인, CEO들도. 내가 보고 싶은 연예인, 신인 뜬다 하면 딱 와요. 

장광효의 취미 중 하나가 길 지나가는 인간 연예인 만들기(…)

대표적인 예가 현빈, 차승원, 유지태



조용필에서 서태지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건너 스타일링을 했음은 그의 패션 세계가 굉장히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컷뉴스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그의 다양성에 대한 갈망은 잘 드러난다.
서태지 씨는 조용필 씨와는 좀 다른 옷을 했죠. 조용필 씨는 좀 정적이라면, 서태지 씨는 좀 영(young)하면서 동적인 옷을 많이 했어요. 저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다른 사고의 옷을 할 때 굉장히 만족도가 높거든요. 요즘도 계속 하고 있지만 이런 컨셉의 옷을 하다가 다른 컨셉의 옷을 했을 때 느끼는 희열감은 대단한 것 같아요. 그래서 조용필 씨 옷을 쭉 하다가 서태지 씨 옷을 하니까 또 새로운 세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임하룡 씨 옷을 하니까 또 다른 재미가 있는 거예요. 또 소방차 옷을 하니까 거기에 또 다른 젊고 경쾌함이 또 있는 거예요.

그가 어느 정도의 인물이었는지는 스타일리스트 김성일과 정윤기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정 : 나는 고등학교 때 돈을 모아서 장광효 선생님에게 옷을 맞추러 간 적이 있어. 장광효 선생님이 아직도 고등학교 때 나를 기억하고 계시더라구. 장광효 선생님이 당시 최고의 남성복 디자이너였거든.

인트렌드 대표 정윤기 씨



목사아들돼지 김용민을 닮은 것 같기도(…)



아쉬운 점은 장광효가 당시 수많은 스타들의 스타일링에 도움을 줬다고는 하나, 그 자세한 기룍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 패션에 있어서 스타일리스트라는 개념이 없었고, 사진자료들도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로피시엘 옴므와의 인터뷰에서 "조용필의 옷장에 있는 옷 중 500벌 정도가 내 옷이고, 소방차에게 만들어준 옷은 1천 벌쯤 될 거다. 나미와 붐붐의 의상을 만들 때도 정말 즐겁게, 열심히 했다."는 발언을 통해 그가 특히 신경 쓴 스타를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하에서는 그와 큰 연을 맺고 있는 조용필과 소방차에 대해 아이돌사와 패션사를 간단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김완선도 보너스로(...)



대중가요계의 전설이자 신, 조용필


사실 장광효가 조용필에게 어떤 옷을 제공했는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도 않기에, 이 둘을 엮어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 더군다나 옷을 500벌이나 준 장광효에게는 좀 죄송한 일이지만(…) 조용필은 패션계에서 별 족적을 남긴 가수는 아니다. 이는 그의 엄청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주얼을 중시하는 가수가 아니었고 방송에 즐겨 출연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돌사(史)에서 조용필을 빼놓고 넘어가기에는 그의 존재감이 너무도 크니까 간단하게 다루고 넘어가자.

서태지는 아마 역사에 다시 나오기 힘든 트렌드 세터일 것이다. H.O.T만큼 많은 유사 그룹을 등장하게 할 모델이 나오리라 생각하기도 힘들다. 아이돌이라는 흐름에 있어서 이들은 아마 다시는 등장하기 힘든 한 획을 그은 가수들로 후대에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당시의 존재감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조용필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대충 차범근과 박지성의 차이라고 보면 편하다. 


대한민국 스포츠계 레전드. 요즘은 이러고 삽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 기사 하나로 모든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올해 가요계를 결산하는 연말 KBS의 ‘가요대상’과 MBC의 ‘가수왕’ 선발을 한 달 남짓 앞두고 인기가수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올해는 가요계를 압도할 만큼 독보적인 인기를 구축한 가수가 없어 이 경쟁이 난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고 하는데 이 이유가 무려… “80년 이후 한두 차례 빼고는 해마다 가요대상 또는 가수왕을 차지, 7연패를 기록한 조용필이 올해 ‘가수왕 포기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그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었다. 

이런 그의 지위 구축은 서태지와 유사성이 있다. 당시에는 ‘아티스트’와 ‘가수’의 개념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몇 가지 차별점을 바탕으로 독보적인 ‘아티스트’ 지위를 손에 쥐게 되었다. 뮤지션으로서의 실력, 앞서나간 음악으로 대중음악계 자체에 변화를 준 변혁, 장르를 넘나들며 소화한 다양성까지 모두 갖춘 최초의 음악가이자, 대중예술가였다. 

다만 ‘변혁’이라는 측면을 제외한다면 모든 면에서 서태지보다 한 수 위였다. 그가 현재 ‘아이돌’에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시장이 작아 타겟팅이 별로 없었던 시대라 ‘10대의 가수’가 아닌 ‘국민가수’ 자리를 너무 빨리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광고도 나갔어염



몇몇 기사로 간단하게 그의 능력을 정리해보자. 

실력은 TV리포트의 기사에 잘 드러난다. 엄청난 훈련과 좋아진 작업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최고로 꼽힌다. 
7일 방송된 SBS TV '한밤의 TV연예'에는 대중음악평론가, 음반제작자, 작곡가, 보컬트레이너, 프로듀서 등 음악 전문가 5명이 출연해 가창력 뛰어난 가수를 선정했다. 그들은 가창력의 필수 조건으로 감성 테크닉 파워 등 3가지를 필수조건으로 꼽으며 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가수로 조용필에 만장일치했다.

변혁은 대중음악 평론으로 유명한 강헌의 인터뷰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는 20세기 한국 가요계에서 딱 한 사람을 조용필로 꼽는데, 그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강 =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물론 김민기, 신중현 같은 위대한 도전적인 명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필을 꼽는 것은 그로 인해서 서구의 대중음악에서 비틀즈가 수행했던 것처럼 산업으로서와 동시에 미학으로서의 대중음악이 조용필로 인해서 완성되었다는 점, 대중적으로 성공한 점, 그만의 몫은 아니지만 그의 시대에 한국의 대중음악이 서구의 대중음악의 지배로부터 독립했다는 것 등을 중요하게 평가합니다. 그래서 한 명만 꼽아야 된다면 조용필을 꼽고 싶습니다.

신동아의 기사를 통해 다양성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새로운 장르였던 록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서양음악과 국악의 접점을 모색했다는 점에서도 서태지와 유사성이 느껴지는 게 흥미롭다.
돌아온 조용필의 음악은 록, 발라드, 뉴 웨이브, 소울, 민요, 동요 등 장르의 백화점이라 할 만큼 다채로웠다. 특히 ‘한오백년’이나 ‘황진이’ 같은 국악풍 노래는 ‘당대의 절창(絶唱)’이란 찬사를 받았고, 젊은 세대는 ‘고추잠자리’ ‘자존심’ 등의 전형적인 록에 전폭적인 갈채를 보냈다. 가요사상 최초의 오빠부대를 형성한 그의 최대 응원군인 십대들은 ‘못 찾겠다 꾀꼬리’ ‘비련’ ‘사랑을 몰라’ 같은 곡에 목이 터져라 ‘용필 오빠!’를 연호했다.

그야말로 리빙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실력, 변혁, 다양성의 배경에는 결국 아티스트의 ‘곤죠’가 자리할 수밖에 없다. weiv와의 인터뷰를 참조하면 그의 완벽을 향한 집착이 느껴진다.
Q : 그런데 이미 멤버들이 최고의 연주자였기 때문에 그런 작업하실 때 자율성을 많이 주는 편이었나요? 아니면 개입하는 편이었나요? 
A : 거의 다 제가 개입했죠. 녹음하다가도 듣다가 맘에 안 들면 다 가고 혼자 남아서 다 지워서 제가 다시 한 것도 많아요.

이런 그였기에 스타일리스트 개념도 없던 시기에 장광효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의 이미지 구축을 위해서 3집부터 적극적으로 패션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는 매니저도 멤버 중 적당히 골라 쓰는 시대였다. 이처럼 기획이 없던 시대를 고려하면, 가수가 스스로의 이미지 구축을 위해서 디자이너를 찾아가 같이 기획을 했음은 그의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이미지 변신은 이 포스팅을 참조.

그리하여 조용필은 이런 스페이스 판타지에서(...)



차가운 도시남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앞서 언급했듯 시대가 스타일리스트 개념도 없었고 비주얼 위주의 가수도 아니었기에 스타일이 크게 화제가 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장광효와 연예인의 협업은 본격적인 댄스가수 소방차를 통해 패션과 스타의 협업 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최초의 성공한 아이돌 패션, 소방차의 승마바지


‘오빠부대’의 원조는 조용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90년대 초반 ‘농구대잔치’이다. 아무렴 당시 나이가 30대로 지긋한 조용필에게 오빠라 부르기는 좀 그렇잖아(…) ‘오빠부대’란 말은 농구대잔치를 통해 탄생했지만, ‘박수부대’라는 말의 주인공은 소방차였다. 이 말 자체가 소방차 때문에 나오지는 않았겠지만 스포트라이트는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엔하위키에서는 “활동당시의 포스는 소녀시대 동방신기 빅뱅 닥치고 버로우였다. 한국 가요계 최초로 아이돌이라는 개념으로 활동했던 가수였으니 말 다했다”라고 평할 정도.

일본 개그맨들도 소재로 사용할 정도니 최초의 한류 그룹(…)


카라의 능욕으로 그 명맥을 잇는 한류



소방차의 당시 인기는 확실히 놀라웠다. 특히 이들은 가요계에 있어 본격적인 댄스 음악의 장을 열어간 그룹으로 기록될 것이다. 물론 당시 소방차 외에도 김완선, 도시의 아이들, 김승진, 이지연 등이 댄스 가수로 (당시에는 율동 음악이라 불렸다) 분류되었지만 소방차는 다른 가수들에 비해 훨씬 격렬한 댄스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경향신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일정한 틀 없이 무정형의 파격성을 띠고 있는 이들의 무대매너는 비디오형 가수의 새 흐름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방차가 보여주고 있는 ‘텀블링 율동’은 (중략)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힘찬 볼륨과 ‘힘의 안무’를 바탕으로 일정한 틀 없이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소방차의 춤 스타일은 마이클잭슨이 유행시킨 끊어지는 듯한 걸음걸이, 꺾어지면서 급격히 동작을 멈추는 브레이크 댄싱의 요소와 허슬 동작을 변형한 짝 맞추기 동작, 기계체조에서 보여지는 전신 율동 등이 코믹하게 혼합되어 있다. 히트곡 ‘그녀에게 전해주오’, ‘어제밤 이야기’ 등은 전형적 댄스뮤직으로 마이클 잭슨 류에 속하는 경쾌한 리듬이 그들의 율동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뭐, 당시 마이클 잭슨의 인기는 마이콜을 탄생시킬 수준이었으니(…)



한편 소방차가 도입한 격렬한 댄스는 비주얼의 강조를 가지고 왔고, 이와 함께 장광효가 스타일링한 패션도 빛을 발하게 된다. 장광효는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술한다. 
곧 방송을 시작하는데 옷을 좀 해달라고 해서 제가 보고 저희 매장에서 한 번 춤을 쳐보라고 했어요.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구상을 해서 승마바지를 제가 디자인해서 입혀서 정말 그 때 젊은이들에게 대단했었죠. 그래서 전국각지에서 멋 좀 부리려고 하는 젊은이들은 다 저희 매장에 와서 소방차가 입었던 옷, 구두, 악서세리 다 달라고 했어요.

당시 장광효는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본 일상에서의 승마복을 무대의상으로 도입했다. 과도한 어깨뽕과 승마바지는 금새 화제가 되었고, 유행으로 이어졌다. 

승마바지 패션을 보여준 소방차



이 소방차를 기점으로 90년대에 기획사와 가수와 패션브랜드가 결탁하여 “이런 스타일”이 최고다 라고 외치는 분위기가 붐을 일어났다. 디씨뉴스에 따르면 장광효는 “승마바지에, 헤어스타일까지 귀여운 컨셉트를 잡아서”라고 했는데…

솔직히 귀엽지는 않다(...)



… 라는 함정이 있다. 다만 장광효의 승마바지에 대한 해석은 나름 재미있어 보인다. 아래의 다른 승마바지와 비교하며 느껴보자.

오리지널 승마바지: 조퍼스 (jodhpurs)

 

요즘 나오는 진짜 조퍼스


 

현재 나오는 패션 팬츠로써의 조퍼스



지금 돌아보면 소방차의 승마바지는 아이돌 패션 최초의 성공작이다. 하지만 소방차의 당시 계약 문제로 인해 활동 기간이 매우 짧았고, 소방차가 이후 유행시킨 건 바가지 머리(…) 정도였다. 물론 장광효는 나미와 붐붐을 통해 디스코 패션을 시도하는 등 다양한 패션을 가수와 접목시켰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후에 철이와 미애로 발전한 나미와 붐붐



유재석과 이적이 나미와 붐붐에 대한 오마주를 선보이며 뒤늦게 뜬 걸 볼 때 선각자일지도(…)



하지만 장광효와 그들의 만남은 패션과 가요계의 만남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남았고, 특히 아이돌의 10대 시장 공략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장광효는 이후 초기 서태지의 스타일링에 도움을 주며 지속적으로 가요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해외의 문화적 흐름이 급격하게 넘어오면서 누군가가 선도하기보다, 다양성을 넘어 혼란스러운 음악과 패션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보너스. 김완선과 디스코 패션


역시 패션과 별 관계는 없지만 김완선을 빼놓기에는 그녀의 무게감이 엄청나서 언급. 당시 김완선의 존재감이란 소녀시대, 원더걸스, 티아라가 하나로 뭉쳐 캡틴 플래닛이 된다고 해도 꺾을 수 없을 존재였다. 김창훈, 신중현, 이장희, 손무현 등 S급 프로듀서들이 음악을 만들고 춤과 노래, 심지어 외모까지 모두 A급 이상인 여성 디바가 등장했다면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닐까 싶다. 요즘 말로는 윤아처럼 생긴 10대가 윤하처럼 노래부르고 공민지처럼 춤을 춘다고나 할까? 당시 음악 시장에는 댄스 가수도 드물었고, 10대 가수도 드물었는데. 

물론 인기 면에서야 소녀시대가 최강이겠지만 김완선은 그냥 존재가 혁명이었다. 네이버 옛날신문 검색에서 특정 인물이 ‘아이돌’로 지칭되는 역사상 두 번째 인물이다. 참고로 첫 번째 인물은 차범근(…) 당시의 기사는 지금 읽어도 상당히 재미있다. 이모 한백희 씨가 원채 독하게 훈련시키며 굴려먹어서 그런지, 그녀에 대한 평은 마치 요즘 아이돌 가수를 보는 것 같다.
매혹적인 큰 눈에 오똑한 코, 1m 64의 키에 49kg의 몸무게를 지닌 균형잡힌 몸매, 그리고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춤 솜씨가 이 10대 소녀 가수를 일약 청소년의 ‘아이돌 가수’로 만들었다. (중략) 김양은 피아노, 기타, 신디사이저 등 각종 악기를 다루는 솜씨도 뛰어나며 요즘은 사물놀이와 열두발상무를 배우는 등 다방면에 걸쳐 소양을 쌓고 있다. (중략) “어릴 때부터 가수가 꿈이었는데 막상 데뷔하고 보니 그 때 생각했던 것만큼 화려한 직업이 아니라 그저 땀흘리도록 요구받는 직업인 것 같아요.”

원조 아이돌의 위용



1집부터 인기가 꽤 좋았고, 3집 이후에는 능력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젊은 댄스 가수는 80년대부터 21세기까지 항상 주류 언론으로부터 까이는데, 활동 시기에 능력을 인정받아 ‘아이돌을 넘어선 아이돌’의 최초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만 은근 상복이 없어서 5집 앨범에 들어와서야 ‘삐에로는 나를 보고 웃지’가 1위를 차지했으며, 양 방송사의 10대 가수로 선정된 것도 5집 활동 시기인 91년이다. 이 때는 그야말로 리즈 시절로 최고의 미녀 가수로도 꼽히고, 여자 가수 최초로 비공식 단일 앨범 판매량이 100만 장을 돌파하기도 했다. 너무 늦게 떴다는 느낌도 있지만, 당시 댄스음악은 비주류에 가까웠기에 요리보고 조리봐도 선구자임은 부정할 수 없다.  

흔히들 김완선의 후계자를 엄정화, 이효리, 손담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솔직히 민망할 수준의 비교다. 가수와 아티스트를 나누는 건 좋지 않은 비교이겠지만, 종합 세트 연예인과 가수를 같이 보는 것도 문제다. 물론 당시에야 딱히 예능 활동의 창구도 없었지만 김완선은 철저하게 음악으로 떴다는 점에서 가수로서의 비교는 꽤나 무리수다. 더군다나 김완선은 아예 경쟁자 자체가 없었고.

데뷔 25년차의 포쓰



이효리는 당시로는 놀라운 슴가와 건강미 때문에 섹시미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뜬 경로가 해피투게더라는 예능이다. 음악적인 면에서는 10minute의 성공 이후에는 표절시비가 연달아 터지는 좌절 루트였다. 엄정화 역시 3집 배반의 장미, 4집 POISON, 초대 정도가 섹시 계열이었고, 5집의 ‘몰라’가 어느 정도 트렌드 세터로의 지위를 마련한 후에는 사실상 연기로 전업했다. 손담비는 그냥 별명이 잠수함이었다. 띄워도 띄워도 안 뜬다고(…) 즉 단순한 섹시 스타라면 모를까? 디바나 마돈나 계열로 생각하면 김완선은 그냥 지금까지도 비교대상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고보니 도전자로 아이비(…)가 있었는데… 뭐, 적당히 넘어가도록 하자.

다만 이런 지위에도 불구하고 김완선의 패션은 별로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당시 80년대 디스코풍 패션을 이끈다기 보다 트렌드가 그랬던 상황에 ‘따라가고, 잘 꾸미는’ 수준이었고, 패션보다는 헤어스타일로 주목받고 유행을 이끌었다. 다만 마돈나를 롤모델로 삼았는지 내는 앨범마다 다른 패션을 시도 하려고 했었던 건 정말 박수를 보낼만하다. 

뭐, 나름 패션에 욕심이 있는지 2006년에는 직접 디자인한 제품을 판매하는 샵을 두타에 내기도 했고, 더 발렌슈타인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했다. 문제는 2011년 11월 팝업스토어까지 열었다는데 정작 홈페이지에 접속이 되지 않는다(...) 주소는 www.thewallenstein.com 이니 근성 있는 분들은 열릴 때까지 새로고침을 하는 것도 좋겠다. 

남자는 근성이다?


 
재미있는 건 최근 들어 디스코풍 패션이 다시금 ‘복고’로 불리며 무대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 디스코와 전자 비트와 만난 게 하우스 음악이고, 셔플 댄스도 원류는 하우스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기도 하다. 티아라의 ‘롤리 폴리’와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는 그 대표곡으로 꼽힌다. 



다만 차이는 있는데 손담비보다는 티아라가 좀 더 복고적이다. 손담비는 펑키한 헤어스타일 정도를 제외하면 통자 원피스, 반짝이, 나풀거리는 태슬 장식 등 90년대의 버블 시기 일본식 디스코텍에서 나온 패션에 가깝다. 이에 반해 티아라는 다양한 컬러, 배기 바지, 데님 재킷, 컬러풀한 스카프 등 맥시머니즘이 반영된 80년대 롤러장과 디스코 패션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면서도 베기바지를 스키니로, 당시 에어로빅 슈즈를 하이탑으로 대체하는 등 어느 정도 현대식 재해석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아래 사진들을 보면 알 수 있듯, 80년대 세계적인 무드는 한국과 약간의 차이는 있었다. 알아둬도 별반 도움이 될 지식은 아니지만 패션기업 면접에서 얘쁜이 티아라 빠가 "티아라의 롤리폴리 룩은 80년대 세계적인 디스코 룩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으니 잠시 들여다나 보자. 세상 일 모른다. 





아무튼 패션과 연예계 모두 산업으로 자리잡지 못한 80년대는 대부분의 가수들이 패션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례 없는 성장의 과실을 누리게 된 90년대 대한민국은 음악과 패션, 모두 전혀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1. 이거 도대체 몇시리즈까지 나올예정? +.+

  2. 소방차에 관련된 일본영상은 소방차 흉내도 아니고 개그맨도 아니에요...
    locking이라고 60년대 미국 흑인엔터네이너들이 시작한 정통 댄스 쟝르입니당. 힙합 직전까지 훵크, 소울을 표현하는 중요한 춤이라능..

댓글을 달아 주세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