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볼거리가 넘쳐나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진행중인 <모딜리아니 : 몽파르나스의 전설>전을 다녀왔습니다. 눈동자가 없는 아몬드형의 눈이 그려진 그림들을 한번쯤 보신 적이 있으실텐데요. 아마 이 그림을 그린 작가에 대해서 잘 아는 분들을 많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아마데오 모딜리아니는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에콜 드 파리의 대표 화가이자, 35세의 짧은 생으로 인해 파리 몽파르나스의 전설이 된 이탈리아 태생의 화가입니다. 

1884년 7월 12일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유대인 가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렸을때부터 매우 병약하여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 전역으로 여행을 다녔고 예술에 대한 열정을 깨닫고 난 후 예술학교를 다니며 미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1906년 파리에 정착하였고 본격적이 예술인의 길을 걸으면서 그 당시 예술의 중심지였던 몽파르나스에서 키슬링, 피카소 등과 친분을 맺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917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인전을 개최하지만 그의 누드화가 외설적이란 이유로 철거 명령을 받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맙니다. 결국 1920년 결핵으로 인한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등진 후에야 그의 작품과 삶이 인정받게 되면서 오늘날까지 '몽파르나스의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폴 알렉상드르의 초상 1909>


폴 알렉상드르는 모딜리아니의 최초의 후견인이자 수집가이자 친구였습니다. 1907년 겨울 생활비가 없어서 쫓겨난 그는 피부과를 개업한 젊은 의사 폴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모딜리아니같은 가난한 화가들을 위해 델타 거리에 작업실을 마련해주었고 모딜리아니에게는 특별히 겅제적인 지원을 하면서 그의 후견인이자 진실된 친구로서 1914년까지 관계를 유지합니다. 모딜리아니보다 3살 연상이었던 그는 모딜리아니가 작가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한데요. 1914년 모딜리아니 작품의 유일한 구매자였고 그를 살롱전과 그룹전에 처음 출품하게 한 것도 그였습니다. 

하지만 1914년 1차 세계대전으로 폴이 군의관으로 참전하면서 7년간의 그들의 관계도 끝이 나버렸죠.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모딜리아니는 그를 위해 초상화 5점을 남겼는데요. 모딜리아니는 한번에 만족할만한 형태를 그릴 때까지 같은 그림을 하루저녁에 열 번도 다시 그릴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바로 위 작품이 그렇게 탄생한 초상화입니다.



1. 남자의 초상

모딜리아니의 인물화는 20세기 초 파리 문화예술계의 인물들을 총망라해놓은 인명사전과도 같습니다. 1916년까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여성보다는 남성이 월등히 많은데요. 남성모델은 동료화가나 화상과 같은 지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문 모델을 쓸만큼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고 무명이었기에 고객들의 의뢰는 더욱이 없었기 때문이죠.

전시장 내부 작품들을 보면 동공이 없는 아몬드형 눈을 가진 인물화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요. 그의 내면을 탐구하는 수단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입니다.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 때 당신의 눈동자를 그릴 것이다'라고 한 그의 말처럼 인물화에 집착하는 그의 예술 철학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말입니다.


<폴 기욤의 초상 1915>


<쉐롱의 초상 1915>


<마누엘 웸베르 에스테베의 초상 1916>


<레오폴드 쉐르바주의의 초상 1918>




2. 여인상 기둥

1910년부터 15년까지 그린 마지막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딜리아니의 여인상 기둥 작업은 셀 수 없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대부분 드로잉이거나 채색을 입힌 수채화이며 드물게는 유화로 만들어진 작품들도 있습니다.


<붉은 여인상의 기둥(앞면) 1913>


양면에 그림이 있는 이 작품은 세개의 그림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엑스선 촬영을 통해 숨어 있는 밑그림을 찾아낼 수 있었는데요. 밑그림에는 모딜리아니의 누이였던 마게리타의 초상이 그려져있습니다. 밑그림은 그가 파리로 오기 전에 리보르노에서 그린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뒷면에는 부부라는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뒷면 그림과 엑스선 촬영본 모두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인상 기둥 1913~1914>


<여인상 기둥 1914~1915>




3. 모딜리아니의 헌신적인 반려자 잔느 에뷔테른느


<잔느 에뷔테른느 1898~1920>


파리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문하생으로 회화 수업을 받던 잔느는 파리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재능있는 소녀였습니다. 그녀가 모딜리아니를 만난 것은 19살이었던 1917년 몽파르나스의 라 로통드 카페에서였는데요. 14살 많은 가난한 유대인 화가와 사랑에 빠진 그녀는 부모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상 즈보로프스키가 얻어준 작업실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합니다. 두 연인 사이에서 1918년 딸 잔느가 태어났지만 건강이 악화된 모딜리아니는 1920년 그만 세상을 떠나고맙니다. 

모딜리아니에 대한 증오로 가득했던 잔느의 부모님은 딸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례를 거부하였고 격분한 잔느는 다음날 새벽 둘째를 임신한 채 부모님의 아파트 5층에서 뛰어내려 스물둘의 나이로 짧았던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비극적 결말인 이들의 사랑은 파리 미술계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고 전설처럼 인구해 회자되었습니다. 1년 후 그들은 함께 페르 라세즈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뮤즈였던 그녀는후기 인물화의 주된 모델이었고 단일 인물화로는 가장 많은 25점에 이릅니다. 그녀를 만난 후 누드화가 하나도 없다는 점도 특이한 점이죠-!


<잔느의 초상 1918>


<앉아있는 잔느 1918>




4. 여인의 초상

1915년까지 모딜리아니의 인물화는 남성이 압도적이었는데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남자들의 참전으로 자연스럽게 여성 초상화의 수가 증가하게 됩니다. 작품 속 여인들은 시기별로 함께 했던 연인이 주를 이뤘고 다음으로 친구의 부인이나 지인, 익명의 여인들 다양해집니다. 

풍만한 여성을 선호했던 그 당시와는 달리 그는 마른 체형의 여성들을 선호했고 그의 취향은 분명 작품만큼이나 독특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여인의 초상(루이즈) 1915>


<마담 소바쥬의 초상 19세기경>


<앉아있는 갈색머리 어린소녀 1918>


<흰 옷깃의 여인(루냐 체코프스카) 1917>




5. 종이작품

그의 종이 작품은 유화와 달리 2000여점에 이릅니다. 그 소재는 인물과 여성 누드화가 압도적인데 이외에 탐구의 일환으로 시작된 엄청난 양의 여인상 기둥에 대한 반복적인 스케치가 다수입니다.


<남자의 얼굴 1915~1916>


<여인의 얼굴 1915>




6. 누드

그의 누드화는 1917년부터 등장해 후기 작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인물초상으로만 일색하던 그가 여성 누드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전문 누드 모델을 고용할만큼 주머니 사정이 나아졌다는 걸 뜻하는 거겠죠. :) 

그의 누드는 분명 르네상스부터 여러 누드화의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차이점은 신화나 풍경, 배경 혹은 계습 비판등이 없는 여체의 절대미를 가장 객관적이고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워 있는 누드(셀린 하워드의 초상) 1918>


<머리를 푼 채 누워 있는 여인의 누드 1917>



<젊은 여인의 상반신 1917>


캔버스에 과슈와 크레용으로 그린 흔치않은 이 작품은 2010년 11월 2일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6천 9백만불이라는 모딜리아니 작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위 <소파에 앉아 있는 누드 또는 아름다운 로맨느>의 연구 습작입니다. 모델은 화상 즈보로프스키가 고용한 모델로 모달리아니가 대상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작업에 몰두하고자했던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앉아 있는 나체 여인>


<앉아 있는 누드>



7. 모딜리아니와 키슬링

모딜리아니와 모이즈 키슬링의 관계는 매우 특별했습니다. 이들의 특별한 관계는 공동작업에서 볼 수 있는데요. 보통 작가들은 서로의 화풍이 다르기 때문에 공동작업을 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그들이 공동으로 작업한 그림들을 보면 여지껏 화풍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죠. 이 둘은 엄청 친해서 서로 작업실도 같이 쓰고 심지어 도구까지도 같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모딜리아니의 마지막에도 함께했던 모이즈 키슬링이었습니다.


<모이즈 키슬링의 아틀리에 1918>


<모이즈 키슬링의 초상이 있는 정물 1918>










이번 모딜리아니의 전시는 그가 왜 눈동자를 쉽게 그려넣지 않았던 것인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단순히 화폭에 모델을 그려넣는 것이 아니라 진정 그들과의 교감을 원했습니다. "내가 추구한 것은 사실이나 허구가 아닌 무의식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작품 속 인물들의 눈동자가 없는 텅 빈 눈으로 내면의 깊이를 담아내고자 했던 그의 노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현존하는 모딜리아니의 유화 작품은 총 400여점이 안될 만큼 14년간 화가로서 그가 남긴 작품 수는 매우 적은편입니다. 더군다는 전 세계에 뿔뿔히 흩어져있는 그의 진품들을 한자리에 만날 기회는 극히 적겠죠-!

전 세계 유명 미술관과 국공립 미술관 소장품 물론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개인소장 작품까지 만날 수 있는 전시였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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